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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칼럼] 잃어버린 갯골 습지 (10)

기사입력 2026-09-13 22:25 최종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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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전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잃어버린 갯골 습지(9) ☜

  역사는 과거에 관한 연구이다. 그렇다고 과거의 모든 것을 기록하거나 기억할 수는 없다. 기록하는 사람에 의해서 걸러지기 마련인 데, 때로는 심히 왜곡될 때도 있다. 무지에 의해서든 의도적인 것이든 왜곡은 악과 오해를 동반할 수 있기 때문에 기록하는 자의 해석과 서술은 책임이 막중하다.
  엄청난 이야기를 하려고 무거운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너무나 무심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기 때문에 돌아보자는 것뿐이다. 필자가 기억하고 있는, 그러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 마을이 있다. 혹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가우련만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공유하고 싶다. 
  당시 그 마을 이름은 ‘산골’이었다. 지금 인천에서 이어지는 비류대로 ‘학미산터널’ 바로 아래에 있었던 마을이다. 마을이라고 해야 필자의 기억에 5~6개 정도의 집이 있었다. 집이라고는 하지만 모두 토담집이다. 크기는 기억이 아스라하지만 겨우 10여 평 남짓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곳에 깃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형제처럼 함께 살았다. 
  사실, 그곳에 깃든 사람들은 모두 피난민이었다. 6.25사변을 겪으면서 북한 지역에서 피난해서 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사람들이 다시 남한 각처에서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기거할 수 있는 곳이 없으니, 당시 누구의 땅인지 모르지만 학미산 기슭에 저마다 적당히 땅을 고르고 흙벽돌을 만들어 쌓아올렸다. 지붕에 얹을 서까래감이 없어서 여기저기서 주어다 놓은 나뭇가지들을 얼기설기 지붕에 올렸다. 그리고 짚으로 엮은 이엉을 얹었다.
  게다가 마을이 앉은 자리가 북서쪽이니 겨울이면 하늬바람이 정면으로 불어온다. 하여 초가집 벽체 전체를 짚이나 건초로 둘러싸야 했다. 그러니 집이라기보다는 움막이나 짚으로 만든 몽고의 게르(유르트)와 같다는 것이 어울릴 것 같다. 그래도 깃들 수 있는 곳이니, 그곳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귀한 보금자리였다.
  하지만 일거리가 없다. 일굴 수 있는 밭뙈기 한 평도 없었다. 겨우 비바람을 피하고, 겨울의 추위를 피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그러니 어딘가에 가서 일을 해야 했지만 산업기반이 전무한 시대에 어디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포동에는 뭔가 생산할 수 있는 일감이 없었다. 염전에서 염부로 일하는 것이 전부인 데, 그마저 한철만 할 수 있고 일손에 비해 일감이 턱없이 적었기에 어디론가 일감을 찾아가야 했다.
  그러니 사람들은 잠자리는 산골에 두고, 객지로 일감을 찾아 나섰다. 주로 인천이나 서울 어딘가에 장사나 혹은 지게꾼으로 일감을 찾아갔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농촌의 일손이 되어 일당을 받고 있을 했다. 그러다가 일터와 가까운 곳으로 한집, 두 집 떠났다. 그리고 지금 그곳엔 그들이 살았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관리자 (sjn44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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